일본 조계지는 개항 때부터 일제강점기 까지 인천에서 일본 세력의 중심지였다. 그 중에서도 일본영사관이 중심에 있었다.

인천중구청

인천 중구청(일본 영사관 자리). 개항 후 이곳에 일본영사관이 자리잡았고 일제강점기 때는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허물고 193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중구청 주변으로는 역사문화의 거리라고 하여 개항장 시대의 모습을 복원하는 작업(사진 왼쪽에 플랜카드도 보임)을 진행하고 있으나 사람 냄새 나지 않는 테마파크 같았다. (외장만 저렇게 바뀌었고 내부는 대체로 바뀌지 않은듯 하며 사람들도 살고 있기는 하다) 새 구청장님은 역사 문화 복원에 어떤 관점을 가지고 계실지 궁금하다.



이 지역은 일제의 강점에 의해 개항장 시대 이후로도 오랫동안 일본 사람들이 거주하면서 일본식 가옥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비록 변형되었다 하더라도 청국식 가옥에 비해 많아서 훨씬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대체로 2층집인데 특징적인 부분은 2층의 발코니 구조이다. 집에 따라서 지붕에 처마만 덧댄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고, 나간만 설치하여 외부로 열려있는 경우도 있고, 창이나 벽으로 막혀있는 경우도 있다. 또한 기본적인 2층 건물 위에 옥탑이나 3층이 증축된 경우도 보인다. 이러한 가옥 사진들을 아래에 나열하였다.






















(역사 문화 거리 조성의 일환으로 거리 주변의 집들을 이와 같은 형태로 단장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듯 하다)



홍예문. 본래 인천조계지(중구청 주변)을 중심으로 일본인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나 일본이 조선에서 득세하고 강점기로 이어지면서 주거 지역이 자유공원 언덕의 능선 너머(송월동, 동인천동 쪽)로 확장되었다. 이에 교통 편의를 위하여 중구 송학동의 능선을 넘어가는 터널을 뚫었다.



홍예문 위에서 구 조계지 쪽을 바라보면 멀리 인천항까지 보이고 길이 뻗어있다. 좌우에 당시 건물들이 늘어서있는 것을 상상해본다.




일제강점기 때 지배의지와 수탈강도가 강했던 목포, 강경과 같은 지방에는 관청, 은행 같은 기간 시설이나 지주의 저택, 창고 같은 것들이 남아있다. 인천에서는 한양에 인접한 항구도시답게 은행이나 무역 관련 건물들이 다수 남아있다.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일본 제 18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다. 지금은 개항장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의 모형과 개항 이후 인천항의 변천사를 전시하고 있다.



인천광역시 음식업조합(중구음식업지부). 일본 제 58은행 인천지점 건물이었다.



일본 제 1은행 인천지점



대불호텔 터. 대불호텔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이었다. 한양보다도 먼저 서구 문물이 유입된 곳이며 무역업과 금융업이 활발했던 곳이었으므로 이해할만 하다.



일본우선회사(해운업) 건물이었다.



인천우선회사와 주변 선창들은 인천아트플랫폼이란 이름으로 개장되어 예술활동과 문화행사를 위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 역시 선창 건물이었다. 전면에 대한통운 글자가 찍혀있다. 뒷쪽으로는 최근에 지어진듯한 대한통운 건물도 보인다. 대한통운의 모태는 "조선미곡창고"이다. 이름 그대로 미곡 품목에 대한 창고업을 하였고 조선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출자해서 만든 기업이므로 그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위 건물의 내부



이번 답사는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주관한 답사에 참가한 것으로 건축사나 문화유산 보존에 관심있는 분들이 많이 오셨다. 나는 학부 때 비슷한 주제로 인천을 답사한 적이 있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던 차에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몇 년만에 다시 둘러보니 아쉬운 점과 새로운 점이 있다.

몇 년 전, 인천 중구 지역은 구도심으로 동인천으로 중심이 이동하고 차이나타운이 기대만큼 활성화되지 못해서 침체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지난번 다녀왔을 때는 어떤 부분은 보수가 필요한 부분도 보였고, 여러 볼거리들이 있음에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 갔을 때는 토요일인 탓도 있겠지만 방문한 사람들도 매우 많았고 번쩍번쩍한 돌로 정리된 모습이 내가 알던 차이나타운이 아니었다. 빨간 패루 대신 회색의 돌패루를 보며 시작부터 뭔가 달라졌구나 싶었다.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많이 방문하는 것은 지역주민들에게도 좋은 일이지만 잘못된 정책은 기존의 역사와 문화를 훼손할 수도 있고, 가까스로 일어난 경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으니 차분하게 신중하게 진행되길 바란다.

새로웠던 점은 답사에 오신 내셔널트러스트 간사님이나 인솔해주신 해설사분의 설명으로 건축사적으로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지난번에는 보지 못했던 산업적인 측면, 어찌 보면 수탈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모습들을 더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다른 분야에서 접근하니 새로운 자극이 되었던것 같다. 오랫만에 나선 답사였는데 계속 나서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 끝 -

차이나타운을 지나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각국조계지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각국조계지는 청국과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들의 조계지를 총칭하는 말이다. 각국조계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자유공원이 있고 당시 유입되었던 서양 문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정말 흔적만 남아있다. 개항 이후 서양 세력이 인천으로 들어왔지만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면서 조계가 철폐되었다. 이후 긴 시간동안 일본의 강점기가 이어졌고, 한국전쟁까지 벌어지면서 예전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다. 자유공원 주변이 높은 지대에 있다보니 포격의 주요 대상이 되었던것 같다. 전쟁 이후에 훼손된 건물들은 보수되기 보다는 철거되었다.

자유공원

자유공원. 원래 이름은 만국공원이었으나 맥아더 장군 동상이 만들어지고 이름이 바뀌었다. 각국조계지는 항구와 거리가 있는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항구의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공원인 자유공원은 그 서양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공원을 만든다는건 그만큼 여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또한 대변할 만한 저택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차라리 민가였다면 변형 보수가 되더라도 남아있었을 것 같은데 안타깝게 되었다. 자유공원의 맥아더상 자리에는 세창양행 사택이 있었고, 한미수교 기념탑 자리에는 존스턴 별장이 있었다. 다시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동상과 기념탑이 갖는 의미 때문에 실현되는데 어려움이 있다.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내항



자유공원

자유공원 내 공연장. 관광 활성화를 위한 공연이 진행중이었다. 하지만 전망대 바로 옆에 위치한 공연장에서 나오는 음악소리는 소음에 가까웠다.



자유공원에서 내려오다보면 인천내동교회가 있다. 외벽 재질은 화강암으로 보이고 지붕에는 기와가 올라가 있다. 한국전쟁 때 파손되어 1950년대에 다시 지어졌다.



인천내동교회 현판. "개항로"라는 주소가 붙어있고, 2007년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598개 교회에 전해진 기념동판이 붙어있다.



인천내동교회 내부. 바실리카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바닥은 마루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



인천내동교회 내부. 기둥과 외벽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지만 내부 지붕은 목조 트러스 구조로 되어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공회가 자리잡은 곳 답게 성공회 관련 건물들이 보인다.



자유공원 주변은 서울 강북의 고급주택가를 보는듯 하다. 조계지 시설 이후에도 부촌의 성격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인천의 옛 지명 "인주"라는 말도 보인다.



인천역사자료관. 일본인이 살았던 건물로 해방 후에 개축되어 한옥과 일본식 집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제물포 구락부 외관. 회칠 마감된 조적 건물로 창 위의 페디먼트가 특징이며 러시아 공사관을 설계한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건물이다.



제물포 구락부 2층 입구. 1층과 연결되는 내부 계단은 없고 입구가 따로 있다.



제물포 구락부 내부. 현재 제물포 구락부 건물에서는 달마다 근대 인천에 영향을 미친 나라들에 대해 돌아가면서 행사를 벌이고 있다.



제물포 구락부 내부. 개항 이후 인천에 모여든 정계 재계 고위급 인사들의 사교장소로 이용되었다.



차이나타운 제1패루

차이나타운 제1패루. 인천역 문을 나서면 바로 볼 수 있다. 이전에 나무로 만들어진 붉은색 패루가 노후되어 새롭게 돌로 만들어졌다.



청일조계지경계

청일 조계지 경계. 중앙의 계단을 중심으로 좌측(서쪽)은 청국 조계지, 우측(동쪽)으로는 일본조계지가 있었다. 몇 년 전에 왔을 때는 중앙에 돌계단 뿐이었으나 현재는 석등과 조경수로 꾸며져있으며 양측의 건측물들도 새로 단장(변형)되어 있다.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최초의 자장면으로 유명한 공화춘 건물은 보수 공사중이다.

기본적으로 청대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조적식 구조(사진의 좌측)이며 외장은 타일로(사진의 우측) 장식되어있다.





청국조계지 건물

청국 조계지의 서양식 건물. 현재 해안성당의 교육관으로 쓰이고 있다.



인천화교협회

청국영사관이 있던 곳. 청국영사관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그 자리에 인천 화교 협회 건물과 그 왼쪽에 화교중산학교가 들어서있다. 협회 건물 뒷편에는 청국영사관 회의청이 남아있으나 들어갈 수는 없게 되어있고 협회 건물 입구를 통해 살짝 볼 수 있었다.



의선당

의선당. 우리나라의 사당과 비슷한 곳으로 오른쪽 건물에 관운상을 비롯한 여러 신상이 놓여있다. 중국 대륙과 인천을 뱃길로 오가는 사람들의 안녕을 빌기 위한 용왕상도 있다.



차이나타운 건물

차이나타운에 있는 가옥. 차이나타운 거리에 남아있는 청국식 건물들은 이러한 형태를 가진 것들이 많다. 1층은 업무나 접대를 위한 공간, 2층은 주거 공간. 2층에는 베란다를 두었다.



청국조계지 가옥

중국 사합원 양식의 청국 조계 가옥. 길가에는 대개 2층 건물이 있지만 거리를 벗어나면 이와 같은 형태의 가옥을 볼 수 있다.

청국조계지 가옥

청국 조계 가옥. 우리나라 양식의 지붕이 올라가 있고 형태가 변형되어 있으나 기본적으로 사합원 양식를 띠고 있다.




차이나타운 거리

차이나타운의 상점 거리.



차이나타운 현대식 건물

차이나타운의 유동인구가 늘면서 대규모 청요리집들이 생겨났다. 우측의 공화춘은 앞서 보였던 옛 공화춘 건물의 주인과는 거리가 멀다. 옛 공화춘의 후손은 상표권을 얻지 못했다.



층층계단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올라갈 수 있는 층층계단은 색색깔로 치장되어있고 주변으로는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섰다. 지난번 왔을 때는 황량해보일 정도라서 손을 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지만, 옛느낌을 살리면서 보수되었어야 할 길이 이렇게 변했다. 그 와중에 기존에 있던 교회 건물도 사라지고 사진과 같이 새로 지어졌다.



북성동주민센터

북성동 주민센터도 중국풍으로 단장했다.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고 위화감이 든다.




지난 7월 3일, 내셔널트러스트에서 주최한 인천 근대 건축 답사에 참여했습니다. 사진이 많아서 나누어 올립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부산, 원산에 이어 개항된 인천은 근대 문물이 급속이 유입된 곳이다. 인천은 한강을 통해 수도 한양으로 연결되는 해상관문이므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인천의 개항이 특히 부담스러웠을 것으로 보이지만, 조선으로 세력을 뻗기 원하는 타국에게는 선점해야할 거점이기 때문에 종교시설과 영사관을 비롯한 기관들이 자리잡게 되었고 조계지를 중심으로 많은 외국인들이 상주하였다. 이에 따라 인천에는 각국의 양식에 따른 근대 건축물들이 세워졌고, 한양보다도 먼저 도입된 서양 문물의 예가 여럿 있다. 지금은 한국전쟁이나 개발에 의해 많이 사라졌으나 아직 볼 수 있는 것들도 많다.

답사에 필요한 지도 및 자료는 인천문화재단에서 발행한 "인천 개항장 역사 도보 여행" 안내 책자를 참고하면 좋다. (인천문화재단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책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에서는 인천을 포함한 전국의 근대 건축물들을 안내하고 있다.


인천역

인천역. 경인선의 종착역으로 현재는 도심이 이동하여 예전처럼 붐비지는 않지만, 최근에 차이나타운이 관광지로 활성화되면서 활기를 되찾고 있다. 사진의 왼쪽에는 "월미 은하 레일"이라고 관광용 모노레일 탑승장이 있다.



경인선은 1899년에 개통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다. 한양에서 인천항의 바닷길로 연결하기 위한 육로 교통수단이 필요했고, 개항 이후 인천이 급격히 발달하면서 인천-한양 간에 요구되는 교통량 및 물류량도 크게 늘었다.


일제시대에 제작된 인천 주변 지도. 붉은색으로 표시된 것이 경인선이고 서쪽 해안에 선들이 두껍게 중첩된 곳이 인천역이다. 인천역 남쪽에 철도가 연결된 부두가 있고, 인천역 서쪽의 섬은 월미도이다. 이후 계속된 해안매축으로 월미도는 육지화 되었고 지도의 부두는 내항의 일부가 되었으며 현재는 월미도 남단에 설치되어 있는 갑문을 통해서만 배가 내항으로 들어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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